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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음악

음악의 아버지 바흐

by 성난온돌 2021. 12. 28.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3.21-1750.7.28)

   아이제나흐 출생의 바흐는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바흐 집안은 루터파 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바흐 가문의 자세는 직업을 넘어 장인정신이 투철한 가문이었다. 특히 바흐는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줄을 조이는 것과 금관악기에 윤을 내는 일 또한 작곡한 악보를 복사하는 일까지 어린 나이에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바흐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할 정도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바흐의 가족은 늘 적은 수입으로 인해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로 인해 바흐가 어린 시절 그의 형제들 중에 네 명이 죽게된다. 그럼에도 바흐 가정은 가난과 삶의 고단함을 음악으로 위로받았고,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그들의 뛰어난 음악 연주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바흐가 9살이 되기 전에 부모님 모두 세상을 떠나 보냈고, 이로 인해 바흐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하기 위하여 10살 때부터 학교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보수를 받아 생활하면서 그 당시 루터교회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바흐는 장남인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에게 양육 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가족의 연이은 죽음과 가난의 경험을 통해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일찍이 깨닫았고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종교적인 가르침과 교훈으로 인해 루터 교회에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었다. 바흐는 14세가 되던 해에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뤼네부르크 성 미카엘 학교에 지원하고 그와 동시에 교회 성가대에 지원하게 된다. 어려운 생활고로 인하여 성미카엘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진학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을 통해 일을 찾게 된다. 그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와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오르간 연주를 하면서 바흐는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벅스테후데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신자들이 부르기 쉽도록 작곡된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인 코랄에서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바흐는 오르간의 손건반과 발건반의 모든 음을 이용하여 화려한 즉흥연주를 시도하게 된다. 이 때 바흐는 자신의 평생의 소명을 깨닫고 종교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이었던 교회 문화는 바흐의 음악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한 화음으로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바흐는 음악가적인 자존심과 고집으로 당시 교회 장로들과의 갈등과 참견을 이기지 못하고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었고, 바흐의 음악적 열정과 종교심을 알아 본 궁정의 바이마르의 에르스텐으로 인해 자유롭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게된다. 이 때 바흐는 매달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여 연주하였고, 음악 교육을 위한 오르간 소품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 첫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두번째 부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까지 총 20명의 자식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절반이 영아기때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나이 38세인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에서 칸토르의 역할을 맡아 감당하던 시절부터는 과도한 교회 업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성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의 역할은 악장의 임무와 도시의 모든 교회들을 총괄하는 음악감독이라는 막중한 자리이며 이로 인해 과도한 업무는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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